경기에서 지는 건 참을 수 있습니다. 상대가 더 잘하면 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지는 방식이 문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끝까지 싸우다 진 경기는 아쉽지만 납득이 됩니다. 그런데 싸우는 것 같지 않은 경기, 타선이 일찍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경기, 투수가 승부를 피하는 경기를 보면 화가 납니다. 점수 차가 같아도 느끼는 감정이 다릅니다.
무기력한 경기에서 팬들이 느끼는 감정은 패배의 실망과 다릅니다. 배신감이라는 단어가 가깝습니다. 응원하러 왔는데 응원할 장면이 없다는 느낌, 선수들이 팬과 함께 싸우지 않는다는 느낌이 옵니다. 이 감정이 단순한 패배보다 더 오래 남고, 더 강하게 남는 이유가 있습니다.
패배보다 무기력에 더 화가 나는 이유를 알면 팬이 팀에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보입니다.
팬은 결과보다 태도에 반응한다
팬들이 패배보다 무기력에 더 화나는 첫 번째 이유는 태도입니다. 결과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잘하면 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태도는 통제할 수 있습니다. 지더라도 끝까지 집중하는 것, 지고 있어도 한 타석씩 최선을 다하는 것은 선수의 선택입니다. 이 선택이 보이지 않을 때 팬들이 반응합니다.
응원한다는 것은 팀과 함께 싸우는 감각에서 나옵니다. 팬이 경기장에서 목이 쉬도록 응원하는 이유는 그 응원이 경기에 영향을 준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수들이 팬의 응원에 반응하고, 그 에너지로 경기를 뒤집는 장면이 실제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수들이 무기력하게 경기를 하면 그 연결이 끊깁니다. 응원이 닿지 않는 느낌이 들고, 함께 싸우는 감각이 사라집니다.
삼성 경기에서 크게 지는 경기보다 무기력하게 지는 경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는데 타선이 별 반응 없이 타석을 소화하는 장면이 나오면 응원하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경기장에 있어도 혼자인 것 같은 감각이었습니다. 무기력한 경기가 남기는 감정이 패배가 남기는 감정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팬은 승리를 원하지만 그전에 태도를 원합니다. 태도가 있으면 패배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무기력은 패배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한다
무기력한 경기가 패배보다 더 화나는 두 번째 이유는 그 경기가 잃게 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패배는 그 경기의 승점 하나를 잃는 것입니다. 무기력한 경기는 그 이상을 잃습니다. 팬들의 신뢰를 잃고, 다음 경기에 대한 기대를 잃고, 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립니다. 무기력한 패배 이후 다음 경기를 보고 싶지 않다는 팬들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구에서 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팀이 패배에 익숙해지는 것이라면, 그 익숙해짐의 신호가 무기력한 경기에서 보입니다. 지고 있는데도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가 없고, 역전하려는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 경기가 반복되면 이 팀이 이기려는 의지가 있는지를 의심하게 됩니다. 이 의심이 화를 만들고, 그 화가 패배에 대한 실망보다 깊게 남습니다.
반대로 크게 지면서도 끝까지 점수를 만들려는 경기는 다릅니다. 8회에 5점을 지고 있어도 선두 타자가 안타를 치고 다음 타자가 볼넷을 골라내고 분위기를 만들려는 시도가 보이면 팬들은 응원할 이유를 찾습니다. 결과는 같은 패배일 수 있지만 그 경기가 팬에게 남기는 것이 다릅니다.
무기력한 경기가 잃게 하는 가장 큰 것은 다음 경기를 보러 오고 싶은 이유입니다. 팬을 경기장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패배가 아니라 무기력인 경우가 많습니다.
화가 나는 팬이 떠나는 팬보다 낫다
무기력한 경기에 화가 나는 팬이 있다는 건 역설적으로 좋은 신호입니다. 화가 난다는 건 아직 기대가 있다는 뜻입니다. 팀이 잘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에 무기력한 경기에 분노가 생깁니다.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 팬은 화도 나지 않습니다. 그냥 경기를 보지 않습니다.
팀 입장에서 화난 팬은 피드백입니다. 무기력한 경기에 대한 팬들의 반응이 구단에 전달될 때 그것이 팀 운영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팬들의 반응이 없으면 무기력한 경기가 반복되어도 구단이 위기를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화를 표현하는 팬이 팀을 더 좋은 방향으로 압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패배보다 무기력에 더 화가 나는 팬의 심리는 팀에 대한 애정에서 나옵니다. 잘해주길 바라는 기대, 함께 싸우고 싶은 감각, 응원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무기력한 경기 앞에서 분노로 바뀝니다. 그 분노가 팀과 팬 사이의 연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신호입니다.
무기력한 경기에 화가 나는 팬이 있는 팀은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그 화가 완전히 무관심으로 바뀌는 순간이 팀에게 더 위험한 순간입니다. 화가 나는 팬을 붙잡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무기력하지 않게 싸우는 것입니다.